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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빈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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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25-09-0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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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_01.png 아! 悲運의 惠嬪(諡愍貞嬪)楊氏 一代記

 

 

m07.png 惠嬪 淸州楊氏光榮된 삶과 悲運의 죽음

저희 壽春君파종회는 매년 숭조.돈종행사를 개최하고 있는데 금년에는 장릉 제향에 단체 참반 하기로 2월 정기총회에서 의결를 보아 현재까지 순조롭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러나 기신제향일이 닥아오자 단종대왕의 保姆(여기서 보모의 뜻은 왕세손 혹은 왕세자 를 훈육하는 女 스승)이신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양씨를 떠올리며, 이제껏 훌륭한 조상의 묘소를 失傳하고 울한에 쌓인 가슴을 쓰다듬으며 수백년을 지내온자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죄인된 심정으로 이글을 쓰며 비운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조선왕조 최대 성군 세종대왕의 후궁이신 혜빈 청주양씨와 조선왕조에서 가장 불운한 임금 단종대왕과의 관계를 보기에 앞서 먼저 혜빈양씨 가계도를 소개 하자면 혜빈은 고려말 중국에서 귀화한 청주양씨 시조 충헌공 楊 起의 4세손 남평현감 楊 景의 외동따님이고 조선왕조 으뜸재상인 황희정승이 고모부이시다.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입궁 하시어 왕자 세분을 두시니 장자가 한남군 諱 어(王+於)이시고 둘째가 저희파시조이신 수춘군 諱 玹이시고 셋째가 영풍군 諱 천(王+泉)이시다.

 

혜빈께서는 세종23년(1441년)에 세자빈(贈 현덕왕후)권씨가 동궁에서 동년 7월23일 단종 諱 弘暐를 낳으시고 다음날 7월24일 서거하시니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 혜빈의 친정 어머니인 이씨를 종1품 奉保夫人으로 봉하고 원손 단종의 유모로 하명하시었다.세종 23년 8월 7일 세종대왕께서는 嬪御 中의 어진이를 가려 혜빈에게 경혜공주와 단종 을 보육하라고 保姆로 하명하시었다. 그때 元孫을 補養할 명을 받아 단종의保姆가 되어 其忠誠과 사랑으로 정성을 다하기를 15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극정성을 후일 조선후기 대쪽선비 유학자 매산거사 洪直弼의 梅山集에 行狀이 33편 수록되어있는데 그중 혜빈양씨 행장 편에는이렇게 撰하였다.

 

『 楊嬪은 處英陵貫魚之列하야 用敎九御에 盡內宰之職하고 受阿保之任하야 輔養元孫에 形神俱竭而不也其勞하야 終能秉彛守經於桑海貿遷之際하니 嗚呼烈哉로다 ~~ 中略 ~~

즉 양빈은 세종대왕의 여러 비빈사이에 처하야 후궁중에서 교훈을 받들어 내조의 직분을

다하고 아보의 임을 맏아 원손을 보양해 모시기를 심신을 다해 소고로움을 늦추지 않아

급변하는 정세 중에서도 끝내 능히 법과 정도를 지켜내었으니 아아 굳세시도다

부인은 성품이 부드러워 禍福에 얽매이고 자손에게 구속되어 스스로의 뜻을 세우지 못하는 이가 많은지라

嬪과 같은 분은 世祖朝를 만나 넉넉히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을 다만

단종계신 줄을 알뿐 자기 자손있음을 개의치 않아 끝내 母子분이 같은 사유로 목숨을 잃으면서 후회하지 않아으니

이야말로 천지가 뒤바뀌어도 내 바른길을 지키리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외로운 충성은 빛나 해와 달로 빛을 다툴 것이니 이쯤 되면 지하에 돌아가 世宗을 뵈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世宗의 內治의 盛함과 밝으심을 이에서 볼 수 있다 이르리로다 시대는 바뀌어 正祖때에 이르러 충성되고 어진 이를 들어내고 숨은 사실을 밝혀내게 되자 諡號를 내리어 報答하고 또 嬪과 두 아드님을 莊陵에 配食하니 굽히고 폄과 밝고어둠이 절로 때가 있는 법이라 이로써 天道의 갚음 있음을 징험 하겠다 그러나 嬪의 가슴 가득한 더운 피가 더욱 빛나지 않아다면 어떻게 이런 결과로 빚어질 수 있겠는가 』이다.

 

이를 입증하는 실록으로는 단종3년(1455년) 1월24일 혜빈에게 노비를 아울러 1백구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운의 역사는 1455년 閏 6월 11일 수양대군이 조선왕조 제7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시작 되었다.

乙亥年에 端宗께서 禪位하시던 날을 當하여는 굳게 玉璽를 잡고 世祖께 대해『 이것은 나라의 重寶라 先王께 교훈이 元子元孫이 아니면 傳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 하며 忠節을 지키셨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즉위 원년(1445년乙亥) 閏 6월 11일 “혜빈양씨,상궁박씨,금성대군 이유,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천, 동지중추원사 조유례, 호군 성문치등이 亂逆을 도모하여 이에 참여한 일당이 이미 많아으니 가볍게 할 수없다.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양씨를 청풍으로 금성대군 유를 삭녕으로 한남군 이 어를 금산으로 영풍군 이천을 예안으로 정종을 영월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여기서단종대왕이 保姆이자 할머니인 혜빈을 얼마나 따르고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 일면을 보면 강제적으로 退位당하는 황망중에서도 세조에게 혜빈의 목숨을 보존토록 상왕으로 전교를 내린 내용이 실록에도 기록되고 있다.

 

세조실록 세조1년(乙亥) 9월2일(甲戌) 2번째 기사를 보면 대신들이 堂上의 의논을 가지 고 혜빈과 상궁박씨를 죽이자는 상소에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 惠嬪, 상궁박씨의 일은 이미 上王(단종)과 더불어 죄를 더하지 않기로 의논하였으니 이는 두 군주의 논의이니 이제와서 바꿀 수 는 없다 ” 하였다.

 

즉 단종의 전교로 세조도 혜빈의 목숨까지는 거론치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약 3개월후 세조 1년(1455년) 11월 9일(庚辰) “ 의정부에 전지하기를 惠嬪 外 3명은 絞殺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라 ” 는 명으로 비운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그때의 忠義로 말한다면 百家에 으뜸되고 千秋에 남을만 합니다. 그때의 상황은 시신마져 어느 누구도 수습 할 수 없어 방치되어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때 혜빈의 친정 당숙되시는 병마절도사 퇴은공 楊 治께서 야밤에 시신을 입관도 못하고 두루마기에 둘둘 쌓아 야반도주 형식으로 한양에서 60㎞를 달려 포천시 신북면 기당리 선산에 평토하여 극비리에 묻어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단종대왕의 일점혈육 누나인 경혜공주의한글수기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평토된 암장묘는 찾아 보는이가 점점 줄어들고 어떠한 표지석도 없는 관계로 자연속으로 묻혀 버리고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물론 처음에는 청주양씨댁 문중에서 비밀리에 香火를 잇도록 하였겠지만 그저 입으로 전하고 손으로 가리킬 뿐이더니 세대는 바뀌어서 그나마 장소마저 잃고 말아습니다.

 

惠嬪(諡愍貞嬪)楊氏의 伸冤 復其官封과 賜諡封墓

아아 통재라

그러나 정의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의 만고불변의 진리라 하였던가. 세월은 흘러 숙종 38년(1712년) 4월 28일(庚辰)의 숙종실록은 이러하다.

 

〇. “ 혜빈양씨 및 그 아들 영풍군 이 천의 관직과 봉호를 회복하라 명하셨다. 양씨는 세종조의 후궁의로써 일찍히 명을 받아 단종을 받아 길러는데 뒤에 이 일 때문에 그 아들 천과 함께 모두 죄를 받아 죽었던 것이다 이 때와서 그 후손이 상안으로 인하여 이 어명이 있었던 것이다 ”

이어 숙종 39년(1713년.癸巳) 4월 2일(己酉) 【숙종실록 61책 53권 25장 b면】

 

〇. 故 惠嬪 楊氏 及 其子 永豐君 等, 日前命許 復其官封, 『 楊氏 等 事實 略見于上 』至是, 因其後孫上言, 又命 賜諡封墓.즉 고 혜빈 양씨와 그 아들 영풍군 이천등을 일전에 그 관봉을 회복해 주기로 허락을 했는데 『 양씨등의 사실은 위에 대략 보인다 』이때에 와서 그 후손들의 상언으로 인하여 또 시호를 내리고 봉묘할 것을 명하였다. 이다.

이어 정조 15년(辛亥1791년)5월 27일(辛丑) 【정조실록 32책 32권 59장 a면】

 

〇. 辛丑/特賜 楊嬪 諡 愍貞. 命 漢南君後孫追造祠版以祀之. 楊嬪, 於 莊陵 有阿 保之勞,終與安平, 錦城, 同成仁之美. 上嘉其苦節, 潣其不祀, 使之追造祠版. 楊嬪 舊號惠嬪,故改賜其諡.敎曰 : “ 中原史記. 其例旣多, 妃 嬪姑勿論, 公主猶有諡焉 楊嬪豈可無易之擧?以 愍貞嬪楊氏, 書干祠版事 , 命該曺, 分付主家. ”

즉 양빈에게 특별히 민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남군의 후손에게 신주를 새로 만들어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양빈은 단종을 어려서 보육한 공로가 있어고 끝내 안평대군, 금성대군과 함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던진 미덕이 있어다.

상이 그 굳은 절개를 가상히 여기고 제사받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신주를 새로 만들게한 것이다.양빈의 엣칭호는 혜빈이기 때문에 그 시호를 바꾸어 주고 전교하기를“ 중국역사 기록에 그와 같은 사례가 많으니 비빈은 물론이고 공주에게도 오히려 시호가 있다. 그러니 양빈에게 어찌 시호를 내려주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신주에 민정빈 양씨라고 쓰도록 해조로 하여금 주인집에 분부하게하라” 하였다.

 

상기와 같이 愍貞嬪 楊氏는 世祖가 禪位받을때 將相과 三宰, 六宗英, 五戚, 死六臣, 生六臣과 무릇 節介에 죽어 의리를 세운 여러 신하의 網狀을 만고에 세운 분들은 이루 헤일 수 없으되 오직 혜빈양씨는 세종의 빈궁으로 元孫 保養과 大行王과의 約條를 목숨보다 귀히 여겨 凜然한 충절을 후일에나마 역사를 바로 세운 것은 事必歸正이라 아니 말 할 수 없다.

 

愍貞嬪(惠嬪) 楊氏 暗葬地 發掘을 위한 後孫들의 活動

상기 기록과 같이 역사적으로 볼 때 愍貞嬪 楊氏는 조선왕조 王統을 지속시키고 확립 하는데 지대한 공로가 있고 숭고한 충절이 입증되고 있으나 매우 애석하고 痛嘆스럽게도 시신이 暗葬되어있는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한째 후손들은 청주 漢南君 祠堂과 고양시 壽春君 묘역에 設壇되어 있는 곳에서 매년 제향을 봉행하며 恨을 달래왔다.

 

復其官封. 賜諡封墓를 御命으로 하명받고도 실행하지 못해 300여년동안 悔恨의 세월을 보내 왔다지금와서 생각하여 보니 민정빈 양씨 암장지 발굴이 이렇게 까지 늦어진 사유중 하나를 정순왕후 思陵과 해주정씨 종중과 관계를 기록한 조선왕조 실록과 민정빈 양씨 암장지와 청주 양씨 종중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보며 실마리를 찾아 보고자 한다.

 

『숙종실록32권 숙종24년(1698년.戊寅) 11월 9일(庚辰)』기록을 보면

“ 정순왕후가 장수를 누려 나라의 동쪽 교외(정업원)에서 살다가 중종16년(1521년6월5일) 승하한 후에 故 찬성 정미수의 선산(現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 자리)에 장사 를 지내었다. 그래서 정씨들이 대대로 그 제사를(注:단종 伸冤復原 前) 받들어 이에 정중희의 이름을 방제(注:신주 아래 왼쪽에 제사받드는 사람의 이름)한 것이니 정중희는 곧 정미수의 후손이요, 정미수의 어머니 경혜공주는 단종대왕의누이가 되기 때문이다 ”상기 例를 보아 민정빈 양씨도 친정 청주양씨 선산에 비록 암장형태로 묻혀 있어지만 암암리에 청주양씨 병사공종중에서 제사를 받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례입니다.그렇지만 아래 사례때문에 1713년 이후에는 香火가 끊겨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숙종실록54권 숙종39년(1713.癸巳) 9월25일(己酉)』 기록을 보면

예조판서 민진후가 아뢰기를 “ 前 군수 정중만은 그의 부모 무덤이 思陵과 아주 가까운 땅에 있어서 이제 곧 이장하려 하는데 사릉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발인 할 때 장차 정자각앞으로 곧바로 지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막기가 어려울 듯하나 사체에는 미안합니다 ” 하자 김창집과 김우항이 모두 금하기 어렵다고하니, 임금이 명하여 윤허하였는데,

또 명하기를 “ 石物은 옮겨가지 못하게 하고 遷平할 때 신칙하여 시끄럽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하라 ”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 사릉뒤에 있던 정씨 선영의 분묘를 상하게 하는 수목을 마땅히 능관으로 하여금 자주 제거하여 허물어지지 않게 하소서 ”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상기 例로 보아 愍貞嬪께서 賜諡封墓 御命을 받은 년도가 숙종39년 1713년 4월2일이고 思陵에서 石物도 못 옮기게 한 날짜와 불과5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거리도 남양주와 포천은 40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思陵에서 해주정씨들이 자기네 선산에서도 마음되로 이장도 못하는 고통을 청주양씨들이 모를리 없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네 선산을 침해받지 않고 지키기 위해 御命에도 불구하고 暗葬地를 모른다고 쉬쉬하며 수십년이 지나자 진짜로 잡초가 우거져 아무도 흔적을 찿아 볼 수 없는 진짜 암장지가 되어버렸다는 저희 수춘군파 선조들로부터전해오는 口傳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유추해석해 볼 수 있는 유사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愍貞嬪 楊氏의 英靈께서 보우하사 所生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파 후손들에게 召命을 주어 以心傳心으로 머리를 맞대게 하셨는가 보다이에 2013년 10월 23일 청주양씨대종회관에서 한남군파(회장台成), 수춘군파(회장鍾完) 청주양씨대종회(회장楊徹愚교학사회장) 3개 團體長이 연석회의를 갖고 3단체가 공동으로암장지를 찾아 발굴하자는데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민정빈 양씨 암장지 발굴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였고 이어 동년 11월 8일한남군회장, 수춘군회장,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 현지거주 청주양씨 병사공종중 현지인들 이 민정빈 암장지로 추정되는 先山內 陵岸계곡을 현장답사하였고, 그후 一次로민정빈 시신 암장지로 추정되는 주변 몇곳을 파헤쳐 誌石으로 보이는 아주 오래된 石物 2点을 발굴하여으며 이를 전문가에게 탁본 및 판독을 의뢰 할 예정이다현재까지 관련 단체 관계자 실무회의가 7회에 거쳐 진행하였다.그간 실무적인 안건으로 암장지 주변 토지買入, 발굴기념 표지석 건립, 발굴시기, 묘역 조성 장소, 예산규모 및 확보방안등을 협의하고 있는 중이다모든게 예법에 맞아야하고 후손으로서는 조상을 섬김에 있어 한치의 소홀함 없이 品格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衆論과 시간이 요할것으로 사료됩니다.

 

이 面을 빌어 한마디 泣訴하자면 이와 같은 역사적 비극은 조선왕조의 비극이자 우리 전주이씨 500만 宗親 모두의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민정빈 양씨 所生 三君派 후손들이 莊重한 墓域 造成工事를 마무리하고 500여년의 悔恨 이 풀릴때까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종친님들의 지속적인 후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2013년 7월.끝

 

◈. 글쓴이

壽春君派 18代 李 千柱  수춘군파총무이사 ☎ 010-8262-6465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산로 183. 606동1305호(주엽동.문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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